"엄마 때문에 너무 힘들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 세 번밖에 찾아가지 못했으니…." "아주 조금 힘들었지만, 엄마가 왜 바쁜지 알고 있기에 오히려 제가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비가 오는 날,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 한 번도 우산을 챙겨 가지 못한 '불량 엄마' 윤정숙(51·아름다운재단 이사)씨가 아들 이규정(28)씨와 10년 전 나눈 대화다. 유치원생인 아들이 "오늘은 회사 나가지 마"라고 울며 치맛자락을 잡을 때도 묵묵히 출근했고, 중학생인 아들을 놔두고 영국 유학길에 오른 엄마였다. 윤씨처럼 한국의 여성들은 '이기적인 엄마'가 되어야만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구조에 놓여 있다.
결혼, 육아, 사회적 차별이 만든 '유리 천장'을 뚫고 당당히 각 분야의 리더가 된 기혼 여성들의 성공 스토리를 담은 '꿈꾸는 여대생에게 들려주는 여성 리더들의 이야기'가 12일 출간됐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가 각계를 대표하는 40대 이상 리더 13명을 인터뷰해 역경 극복 비결을 모은 책이다. 13명은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김혜정 듀오 대표이사, 박경희 KBS 아나운서실장, 조윤선 한나라당 대변인, 황미나 만화가, 심상정 전 진보신당 공동대표,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지은희 덕성여대 총장, 신혜수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 등이다.
기부문화 확산을 도모하는 시민단체인 '아름다운재단'에서 3년째 이사를 맡고 있는 윤씨는 "언젠가 나도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드는 데 쓰일 것이란 기대를 잃지 않았다. 여러분도 꿈과 열정을 잊지 말라"고 조언했다. 1980년 결혼한 뒤 다음해 출산한 윤 이사도 기혼 여성을 회사에서 퇴출시키는 관행과 육아 때문에 취업·퇴사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진 여성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좋은 세상이다"는 생각을 갖고 87년부터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아이 엄마에게도 일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돼야 한국의 미래가 더욱 밝아진다"고 말하는 그는 "'너 혼자 해라'는 식의 사회야말로 가장 냉혹하다"고 지적했다.
올해 의학 부문에서 호암상을 수상한 김빛내리(40) 교수는 "힘들고 불안한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는 선배들의 증언에서 20대 여대생들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98년 박사 과정을 마친 후 남편을 따라 지방에 간 김 교수는 딱히 나갈 만한 실험실을 찾지 못한 채 희망을 잃었다. 김 교수는 "한때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좌절감에 빠졌지만 슬럼프를 극복하고 나니 객관적으로 힘든 과제조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우그룹공채 사원으로 시작해 결혼전문업체 '듀오'의 대표이사가 된 김혜정(45)씨는 "조직이 여성에게 중요한 일보다 허드렛일을 시키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조차 최선을 다해야만 남성과 차별화가 생긴다"고 말했다.
'결혼은 곧 퇴사'라는 아나운서들의 구습을 깨뜨린 박경희(55) 실장은 "자신의 위치를 지킬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는 일이 여성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일과 육아를 동시에 수행한 '슈퍼맘'들은 "기혼 여성에 대한 사회제도 마련이 시급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박유리 양진영 기자 nopimula@kmib.co.kr